아주 오래전부터 무리 생활을 해왔던 인간에게, 무리에서 이탈된다는 것은 바로 생사와 직결되는 문제였을 것이다. 농경과 목축이라는 식료 생산이 시작되기 이전의 인류는 야생의 동식물을 포획ㆍ채취하여 생존의 수단으로 하는 수렵채집민이었다. 먹고살기 위한 본능으로서 수렵 채집 사회는 계층이나 국가가 발생하기 이전의 인류사회의 보편적인 모습이었다. 인간의 역사를 두고 보면 1만 년이라는 아주 오랜 기간 동안 우리는 수렵채집인으로 살아왔다. 노동자로서의 기간은 고작 200년뿐이다. 그렇기에, 수렵채집인의 DNA가 아직 우리에게 남아있다고 함은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사냥은 양쪽의 목숨을 걸고 진행되는 전투의 또 다른 형태였으며, 사냥의 성공은 생명의 보존을, 실패는 곧 무리의 죽음과 직결되는 문제였을 것이다. 만약, 사냥을 하는데 무리에 도움이 안 되거나 방해가 되는 사람이었다면, 그는 무리 전체의 생존을 위협하는 존재였을 것이며, 그런 이들은 사냥에서 철저하게 배제되었을 것이며, 사냥에서 획득한 식량을 배분하는 과정에서도 제외되었을 것임을 상상해 보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무리에서 이탈된다는 것은 곧 죽음과 가까워진다는 공포를 본능적으로 느끼게 되었을 것이다..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은, 개인 생활보다 무리 생활을 하는 것이 생존 확률을 높이는데 유리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았을 것이다. 1만 년이나 되풀이되어온 수렵 채집의 시간은 우리의 DNA에 이러한 공포와 무리 생활을 각인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다른 말로 우리를 사회적 인간이라고 칭하고 있지만, 결국은 무리에서 이탈하지 않으려는 생존본능이 연결된 개념과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현재로 시간을 옮겨와 보자. 지금도 우리는 끊임없이 크고 작은 무리를 만들고 있다. 기업에서부터, 군대, 정당, 동호회, 동네 친목 모임, 친구들 모임에 이르기까지 몇 명만 모여도 우리는 본능적으로 무리를 만든다. 그리고 그 무리에 속함으로써 심리적인 편안함을 느낀다. 아니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무리에 속하지 못함으로써 느낄 수 있는 공포심을 갖지 않으려고 기를 쓴다. 무리를 위해 필사적이다.
일단 무리에 속하게 되면, 그 무리의 눈 밖에 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왜냐하면 아직도 우리의 DNA는 무리 밖으로 몰리는 것은 곧 사회적 죽음이라고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최근에 목격한 재미있는 사례는, 일면 사회적으로 존경받고 지식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도 왼편 혹은 오른편의 무리에 속한 자신을 그들 무리의 눈밖에 나지 않으려고 필사적이라는 것이다. 때로는 논리, 법률, 정당성, 심지어는 국민이라는 이름까지 붙여서 쓴다지만, 그 무리에 충성을 하는 것만이 생존에 필요한 전략임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실행하고 있는 것뿐이다.
저기 누워 계신 분들은 무슨 생각 중일까 궁금하다. 내가 만약 저기 누워 있다면, 홀연히 일어서서 왼쪽 반대편으로 걸어가서 피켓을 주워 들고, 누워 계신 분들에게 생각을 바꾸도록 강요할 수 있을까? 앞으로 1만 년의 세월이 더 흘러서 DNA에 각인된 공포심이 희석되지 않는 한 요원할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한편, 용감하게 양쪽 무리에서 뛰쳐나와 홀로 서기를 시도하고 있는 새로운 인류의 출연이 너무 반가운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는 어느 쪽이 되어야 할까? 앎과 행동이 다르지 않은, 홀로 서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인간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단상을 가져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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